로그인  회원가입  

접속자 어제 / 오늘
전체
트위터로 보내기 미투데이로 보내기 싸이월드 공감
기사글확대 기사글축소 기사스크랩 이메일문의 프린트하기

채널경남 류영수 대기자 備忘錄(비망록) 나의 삶, 나의 인생 - 1장

첩첩산중 문화 류씨, 빈농의 아들로 태어나 신산의 세월…/ 나의 유년시절, 흙수저 보다 못한 잡초였다
류영수(ryugod00@naver.com)  등록날짜 [ 2022년06월29일 09시29분 ]   이기자의 다른뉴스보기


잡초는 무조건 나쁜 식물만은 아니다. 
농사를 지을 때 가장 고역스러운 일이 잡초관리라고 하지만 잡초에 대한 인식과 태도를 바꾸어 잡초를 친근하게 대하며 잡초의 생리를 알고 관리한다면 농작물에게 오히려 도움이 된다고 한다. 
잡초의 종류를 보면 갈대, 강아지풀, 도깨비바늘, 민들레, 산딸기, 쇠뜨기, 제비꽃, 클로버, 쑥, 별꽃, 쇠비름 등 종류는 아주 많다. 재미있는 사실은 칡은 우리나라에서는 잡초에 속하지 않지만 미국에서는 잡초에 속한다고 한다.
 
또한 잡초는 소나 양을 키우는데 있어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비록 소가 잘 먹는 (잡초)이라고 할지라도 방목을 하는 목초지에선 소의 배설물을 분해해 토양이 더 기름지도록 도와주며 그를 이용해 성장한 식물은 또다시 소들의 먹이가 된다. 그리고 잡초들은 목초가 더 이상 자랄 수 없는 땅에서도 잘 자라 목초에게 자리를 내어준다. 또한 그늘을 만들어 토양의 건조를 지연시켜 황폐화를 막아준다. 당장 잡초가 없어 사막화 되는 몽골의 유목지를 보면 잡초가 얼마나 고마운지 알 수 있다. 미국의 과학전문지 사이언스 최신호에 따르면 논이 사라지면 논둑이나 주위의 다양한 잡초가 만드는 작은 생태계가 사라지고 시간이 감에 따라 거대 단일 생태계가 만들어지면서 많은 생물들이 사라진다고 밝혔다. 이것은 생태계의 최상위자인 매가 멸종되는 엄청난 비극이 되기 때문에 잡초는 생태계 먹이사슬의 기본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잡초만 보면 없애버리려고 난리다. 그리고 고생과 역경을 경험하면서 생긴 근성 있는 사람들에게 '잡초 같은 인생', '잡초 같은 사람'이라고 표현한다. 힘들지 않고 잘 자란 사람들에게 쓰이는 '온실 속의 화초'와 대비된다. 어쨌든 잡초는 무조건 나쁜 식물만은 아니다. 다음은 가수 나훈아의 히트곡 ‘잡초’의 일부분이다. 
 
 
아무도 찾지 않는/ 바람 부는 언덕에/ 이름 모를 잡초야/ 한 송이 꽃이라면/ 향기라도 있을텐데/ 이것저것 아무것도 없는/ 잡초라네/ 발이라도 있으면은/ 님 찾아갈텐데/ 손이라도 있으면은/ 님 부를텐데// 이것저것 아무것도/ 가진 게 없어/ 아무것도 가진 게 없네/ 아무도 찾지 않는/ 바람 부는 언덕에/ 이름 모를 잡초야
 
 
그렇다. 잡초는 아무도 찾지 않고 아무 것도 가진 게 없지만 밟아도 바람 불어도 혼자서 잘도 자란다. 흔히 사람들은 “저놈의 잡초들”이라며 잡초를 ‘모욕’한다. 그러면 안 된다. 잡초가 우리 인간들에게 직간접적으로 주는 이득은 한두 가지가 아니다. 예를 들면, 산악 지형이 많은 우리나라에서 경사지 토사의 붕괴를 막아주는 건 십중팔구 잡초다. 잡초는 웬만한 나무나 콘크리트보다 경사지 유실을 막는 데 효율적이다. 
그리고 옛말에 "소(혹은 토끼)가 먹는 풀(잡초)이면 사람도 다 먹을 수 있다"는 말이 있다. 이는 뒤집어 생각해보면, 소나 토끼들이 먹는 잡초 성분 가운데 약리 작용 등 치유 기능이 포함된 것들도 적지 않다는 뜻이기도 하다. 
 
우리들은 가끔 자기 자신을 ‘잡초 같은 내 인생’이라고 비하한다. 내가 잡초인줄 모르고 하늘을 향해 소리 지르는 것도 그렇지만 자기 스스로가 잡초인줄 알고 너무나 겸손하게 혹은 쥐 죽은 듯이 숨어 사는 것도 그리 좋은 방법은 아니다. 조물주가 삼라만상을 창조할 때 모든 피조물들이 다 씀씀이가 있었기에 만들었을 것이다. 잡초 같은 내 인생이 아니라 잡초인 내 인생도 분명 어디엔가 쓸모 있는 존재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일본 영화 <백엔의 사랑>에 이런 대사가 있다 “밑바닥 인생은 있어도 보잘 것 없는 인생은 없다”라고. 오늘 잡초를 생각하면서 많은 교훈을 얻었다.
  
문화 류씨(文化 柳氏)의 후예
  
나의 지난 날들을 되돌아보면, 내 삶은 잡초와 다름없었다. 빈농의 아들로 태어나 신산(辛酸)한 세월을 보냈었다.   
거창군 가북면에 보해산이 있다. 산이름을 풀이하면 보물 보(寶)에 바다 海(해). 보해산은 여섯 개의 암봉으로 이어진 암릉이며 암릉은 칼날처럼 날카롭고 그 아래는 천 길 만 길 낭떠러지이고 절벽과 맞물린 채 보이는 웅장한 철옹성, 보해산은 설악산 용아릉 축소판이다. 
보해산 위로는 불영산과 아래로는 금귀봉이 있으며 보해산 서쪽 기슭은 소나무가 많이 자라고 있으며 송이버섯이 많이 나기로 유명하다.  
 
보해산(普海山 912m)은 하늘이 보이지 않을 정도롤 우거진 수림, 거창을 둘러싼 산세를 향해 탁 트인 조망, 깎아지른 암벽들의 행진이 보해산만이 가지고 있는 매력이다.
산딸기와 취나물이 지천인 등산로를 따라 능선에 올라서면 여러 군데 전망 포인트에서 눈에 들어온다. 거창의 산들이 펼치는 거침없는 파노라마를 보고 또 보며 걸을 수 있다. 그리고 보해산 정상을 넘어서면서 울퉁불퉁 바위길, 깎아지른 절벽전망대가 끝없이 이어진다. 특히 가파른 바위 하산길을 내려와 능선에 접어들면, 왼쪽으로 올려다 보이는 보해산 암벽지대의 장관은 모든 피로를 말끔히 씻어준다.
보해산자락 아래, 가북면 해평리가 있다. 해평리는. 회남, 추동, 연곡, 양암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 마을 가운데 회남(淮南)마을 있다, 옛날에는 널무이(板門洞)라고 불렀다. 거창군지에 따르면(349쪽 가북면 편) 300여년 전 문화류씨가 마을을 열었다고 한다.
문화 류씨(文化 柳氏)는 황해도 신천군 문화면을 본관으로 하는 한국의 성씨이다.
 
문화(文化)는 황해도 신천군(信川郡) 문화면 일대에 있던 옛 지명이다. 고려 고종이 무신정권을 종식시키고 문(文)을 회복했다고 해서 류경의 고향 유주를 문화로 개칭해 하사한 이름이다.
시조 류차달(柳車達)은 왕건이 후백제를 정벌할 때 군량을 보급한 공으로 대승(大丞)에 제수되었고 삼한공신(三韓功臣)의 호를 받았다. 《문화류씨족보》 흥률사 상량문에 의하면 류차달은 903년 나주전투에서 태봉국 왕건 장군에게 가병 천명과 군량을 제공했다고 한다.
7세손인 류공권(柳公權)이 1160년(고려 의종(毅宗) 14년) 과거에 급제하여 명종 때 정당문학(政堂文學)·참지정사(叅知政事)에 이르렀다.
 
그의 아들 중 류언침(柳彦琛)은 무관으로 상장군과 추밀을 역임하였고, 류택(柳澤)은 과거에 등과하여 재상이 되었다. 류택의 아들 류경(柳璥)이 1258년(고종 45) 최의를 죽이고 최씨 무신정권을 종식시킨 공으로 추성위사공신(推誠衛社功臣)에 봉해졌고, 고향인 유주(儒州)가 문화현으로 승격되었다.
문화 류씨는 조선조에 134인이 대과(大科)에 급제하여 음사(蔭仕)를 포함 실직당상관이 90여인에 이르렀다. 그 중에 상신(相臣) 9인, 호당(湖堂) 5인, 청백리(淸白吏) 4인, 공신(功臣) 11인 등이 배출되었다. 시호(諡號)는 22장이 내렸는데, 그 중에 문시(文諡)는 7장이다.
회남마을은 예나 지금이나 심산유곡(深山幽谷). 
 
마을 뒤쪽에 하늘에서 선녀가 내려와 옷을 벗었다는 탈이골이 있다. 회남, 그러니까 내 안태고향 널무이마을 저편에 추동마을이 있다. 추동 뒷산에 엄청 사나운 독수리들이 살았다해서 수리더미바위가 있다. 
동기감응(同氣感應)이라, 독수리의 억센 발톱 형상을 마을사람들이 이어 받아서일까?   
 
마을사람들은 “척박한 산비탈을 개간, 감자 따위를 심어 연명했었다”고 옛어른들은 말씀들 하신다. 이 곳은 쌀 한톨 나지 않은 깊은 골짜기이다. 
한편 이 곳은 문화류씨, 내 조상들이 어렵게 살았던 안태고향이기도 하다.    
 
며칠전 글쓴이는 풍수가 야은(野隱) 거사와 거창군 가북면 널무이(회남) 내 안태고향을 찾았다. 야은 거사가 내 안태고향을 감싸고 있는 수리더미바위를 지켜보더니, “허허 영락없이 저 바위가 독수리관상이구먼, 독수리는 말이외다. 하늘의 제왕(帝王)이지요. 맹금(猛禽) 중에 최고 강한 포식자. 사자, 호랑이 같은 맹수(猛獸)가 지상에 있듯이 하늘에서는 독수리가 왕이오.”
 
성체 독수리는 여우, 산양도 사냥한다. 큰 늑대도 거침없이 덮쳐잡는다. 날카로운 발톱은 피부를 뚫고 폐까지 관통한다. 비명도 제대로 못 지르고 절명한다. 독수리는 한 번 상승기류를 타면 한순간에 하늘 높이 오른다. 
야은 거사는 지나가는 말로 이렇게 말한다.
“아마 이런 맹수 형국 산 정기를 이어받아서인지 류 회장(글쓴이)께서도 좀 사뭇 독한? 허허, 그렇죠?”
 
  
장가 간지, 얼마 안돼 
강원도 전쟁터에 투입된 아버지 
  
1950년대 초, 첩첩산중 널무이마을 (회남) 문화류씨 빈농 자제, 한 총각(류정흠)이 옆동네 주상면 성기리 흥석동 처녀(장분순)와 백년해로를 맺었다. 
성기리 지명유래를 살펴보면, 성스러울 성 聖에 터 기(基)기인데, 성기리에서 고려왕사 희랑대사가 출생했다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흥석동은 지명 그대로 돌(石)이 흥(興)한 마을이다. 마을 앞 당산에 있는 넓다른 바위를 흥석이라 했다.  
 
신혼의 단꿈도 잠시, 그 총각(이 분은 나의 아버지이다)은 군대에 강제징집, 강원도 인제 전투에 투입된다. 1951년 3월 말 유엔군이 캔사스선(문산∼연천∼화천저수지∼양구∼간성을 잇는 선)까지 진출하자 공산군은 전선 분할과 양익 포위공격으로 유엔군을 서울 이남으로 격퇴시킨다는 작전계획을 세우고 1951년 4월 22일부터 29일까지 약 30만 명의 병력을 동원해 서부와 중서부전선에서 공세를 취했다.
 
4월 공세 이후 공산군은 계속해서 중동부전선의 돌출된 국군을 섬멸한다는 작전계획 하에 2개 병단 약 54만 명의 병력을 동원하여 1951년 5월 16일부터 일명 ‘5월 공세’를 개시했다. 이 때 공산군은 미 제10군단 우측의 국군 제5·7사단, 국군 제3군단 예하의 제3·9사단, 그리고 국군 제1군단 예하의 수도사단, 제11사단을 공격목표로 하였다. 특히 강원도 인제지역의 국군 제3군단이 주요목표였으며, 이를 위해 공산군은 이 지역으로 중공군 2개 군단(제20·27군단)과 북한군 1개 군단(제5군단)을 투입하였다. 
공산군과 유엔군 국군은 인제군 현리(縣里)에서 피비린내나는 전투를 벌였다. 
 
다음은 먼훗날 류정흠(아버지)의 구술이다.
“허허 1952년도 겨울, 경남 거창 땅 보해산 자락에서 자란 스물도 안된 총각이, 장가 든지 얼마 안된 놈이, 나라를 지키겠다는 의협심 하나로 국군에 입대했지. 
강원도 전선에 투입, 날마다 인민군 중공군 소탕을 위한 치열한 전투가 벌였지. 내가 살기 위해서 남을 죽여야 하는 지옥 같은 날들이 이어졌다 아이가. 눈을 질끈 감고 방아쇠를 당기면서도 마음속으로는 끝없이 관세음보살을 외쳤다 나는.
한바탕 싸움이 끝나고 나면 골짜기마다 적과 전우의 시체가 즐비했지. 한 번은 대신 작전에 나갔던 전우가 싸늘한 시체가 되어 돌아왔다. 역한 피비린내를 맡으며 나도 언젠가 저렇게 죽을 것이라는 공포에 휩싸이곤 했다. 죽음에 대한 공포와 괴로움 때문에 악몽으로 진저리치는 날들이 계속됐다“. 
그러다 아버지는 적의 총격에 크게 다치게 된다. 
 
이 과정에서 아버지 류정흠 국군용사는 크게 다쳐 육군병원으로 후송된다. 
이후 몸이 회복되어 다시 전장터로 간 아버지 류정흠은, 그 난리통에 무사 구사일생, 1954년 고향땅을 찾게 된다. 
가진 게 별무(別無)였던 지라, 아버지는 형님집에서 머슴생활을 했다. 아내 장분순은 성기마을 한 켠에 주막집을 차려 산 나무꾼들 대상으로 국수, 묵을 팔며 어렵게어렵게 삶을 지탱해 나갔다. 
1954년 류정흠 장분순 사이에서 나, 류영수는 세상에 나왔다.  
나의, 어린 시절을 회상하자니 제일먼저 떠오르는 것이 이(爾)였다.
맨날 흙탕 먼지 속을 싸질러다니고도 한달씩 감지 않아 이가 기어다녀도 머리는 잘도 길었다. 부스스한 까치머리를 참빗으로 훑어내면 서캐가 하얗게 쏟아졌다. 
 
집안에 우환도 많았다. 내 나이 일곱 살 때였다. 세월이 흘러 외삼촌이 말한다.  “어느날 갑자기 니(너)가 팍 죽었뿐기라, 숨을 안 쉬능기라. 워낙 못 묵어 나서 영양실조로 죽었 뿐 거라, 그래서 내캉(외삼촌) 너그 큰아부지하고 죽은 니를 멍석에 돌돌 말아, 산에다 묻얼라꼬 산에가 땅을 파고 있는데 희한하데 니가 숨을 골탁골탁 쉬더라, 그래서 니를 다시 대코 집으로 안 왔나. 니 명이 길어, 지금 니가 이렇게 거리를 활보하고 안 있나?”
1960년초 막내 여동생(현숙)이 혼비백산 죽고 말았다. 참 어처구니 없는 죽음이었다. 어느날 아래 여동생 숙희가 현숙이를 포대기에 싸여, 업고 마을 한쪽에 서 있었다.  
 
마을어귀에서 어스렁대고 있는데, 전쟁통에 넋이 나간 마을 사내가 맹수처럼 달려와 현숙이 얼굴을 보고 괴성을 내질렀다. 2세도 안된 어린 막내 여동생은 그 소리에 까물어치고 말았다. 미친갱이의 괴성에 충격을 받아 어떻게 손 쓰볼 틈도 없이 막내 여동생 현숙이는 죽고 말았다. 
내가 7세 나이에 영양실조로 초죽음을 당할 뻔 한 사건, 어린 여동생이 전쟁통 넋이 나간 사람 괴성 때문에 비참하게 죽고 만 사건이 지금도 내 뇌리에 지워지지 않는다. 
 
아마 이런 일들은 한국동란 전후 이 땅에 비일비재했을 것이다. 
 
어머니의 모유는 세상에서 가장 완벽한 음식이라고 한다.  
흔히 어머니들은 자식들이 자신이 만든 음식을 맛있게 먹을 때가 제일 행복하다고 하며, 자신이 안 먹어도 배가 부르다고 한다. 우리들이 어릴 때 먹은 음식들의 재료를 보면 그리 뛰어난 것들이 아니었다. 최선근 시인은 어머니가 만들어준 음식을 이렇게 추억하다.
 
 
어머니/ 어머니 손맛이 그립습니다/ 보릿고개 넘어가던 목메인 가난은/ 배고픈 설움에 찬 밥 한 그릇/ 물 말아 김치 한 가닥 걸쳐 먹던/ 어머니 그 손맛이 그립습니다
 
어머니/ 가난한 옛골 그 손맛 그리워/ 오늘은 산해진미 천하제일 맛집에서/ 아무리 먹고 또 먹어도/ 눈물 젖어 허기진 배를 채워주던/ 감칠맛 나는 그 손맛이 아닙니다
 
김장도 한 해 농사라고/ 해 저문 냇가에 짚불을 밝히고/ 김장 날은 온 식구 한 자리에 모여 앉아/ 가난도 가난이지만 배고픈 설움이/ 제일 큰 설움이라 달래며/ 물 말아 김치 한가닥 얹저 주시던/ 곰삭은 그날의 음식이 그립습니다 
 
 
그렇다. 산해진미 천하제일 맛집의 음식도 엄마 손맛보다 못하다. 다들 이렇게 말한다. “나는 우리 엄마 음식이 제일 맛있어”라고. 지금은 더 맛있는 재료, 더 복잡한 조리법을 거친 음식들을 손쉽게 먹을 수 있고, 수많은 요리 프로그램이 입맛을 자극하는 음식들을 소개하고 있지만, 때로는 그 단순하기 그지없는 어머니의 음식 맛은 누가 뭐라 해도 천하진미다. 
‘마음을 움직이는 맛, 맛을 느끼는 것은 혀끝이 아니라 가슴이다’라는 영화 ‘식객’의 대사가 생각난다. 
 
미국에서 사형수들이 사형집행 전에 청하는 마지막 식사 메뉴를 조사해봤더니 대부분 어렸을 때 가족들과 함께 먹었던 소박한 음식이었다고 한다. 우리들은 누구나 할 것 없이 음식 냄새를 맡으면 그 음식과 함께 떠오르는 추억들이 하나씩 있다. 고소한 부침개 냄새를 맡으면 어린 시절 너른 대청에 앉아 오순도순 김치부침개나 부추부침개를 먹던 가족들이 생각나는 것처럼. 아마 그맛은 어머니의 손맛일 수도 있고 어느 식당에서 좋아했던 옛 연인과 먹었던 음식일 수 있다. 아무튼 요즘처럼 어려운 세상살이에서 힘을 내고 용기를 얻을 수 있는 것은 가족들이고 예전 어머니가 만들어 준 그런 음식일 것이다. 그리고 집 밥이 특별한 이유는 어머니의 사랑 그리고 살아온 추억이 고스란히 담겨 있어서 그런 것 같다. 
  
주정뱅이 손님들 시중을 드느라 어머니는
  
언젠가 채널경남 자유기고가 Q작가가 나에게 이런 질문을 했다. 
-유년시절 어머니가 해준 음식 중에 어느 음식이 가장 기억에 남습니까?
 
필자는 이 질문에 너털웃음을 터트리며, “내가 말이오 쌀밥을 구경한 건, 태어나 중학교 2,3학년 때 가출했다가 몇 달 만에 다시 고향에 돌아왔더니, 담임선생님이 지기 집으로 부르더군, 갔더니 선생님이 먹다가 만, 밥을 주더군, 그걸 먹은 게 난생 처음 쌀밥을 묵어 봉거요, 허허. 
우리 어릴 적에, 뭘 묵고 컸느냐? 감자하고 산에 나는 그 뭐요 그 속에 독이 들었는지 모르고 산에 나는 풀 나무 그런 것 먹고 커서 유달리 어머니가 해준 맛난 음식 같은 건 생각이 전혀 없네 허허“
그렇다. 쌀 한톨 안 나는 척박한 곳에서 우리는 허접쓰레기 농작물을 먹고 살았었다. 
 
거창군 주상면 성기마을, 읍으로가는 길목에 허름한 주막 하나가 있었다. 손님 두세명이 겨우, 앉을만한 곳에 울바자(울타리를 만드는 데 쓰는, 대나 수수깡, 싸리 따위로 만든 바자)가 있었다. 지나가는 객들은 이곳을 찾아 국수 막걸리를 마시며 주막 새댁을 희롱했다. 
얼굴이 불콰하게 상기된 주정뱅이들이 서로 멱살을 뒤틀어잡고 패대기질을 벌이는가 하면 새댁 주모를 옆자리에 앉히려고 고래고래 고함을 내질렀다. 
주모는 눈자위를 허공에 걸고 주막마당에 퍼질러 앉아 넉장거리를 했다. 
 
이 주모가 바로 내 어머니 장분순이었다. 당시 서른도 안된 나이에, 전쟁통에서 크게 다친 서방, 슬하 자식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뭇남자들의 희롱을 받아드리며 힘들게 삶을 영위했었다. 
꼭두새벽부터 밤 하늘 별이 뜰 때까지 주정뱅이 손님들 시중을 드느라 어머니는 자식들을 돌볼 처지가 못 되었다. 
해서, 당시 어머니를 추억하자면, 어머니는 가솔들 입에 풀칠이라도 시키려고 뭇사내들 속에서 고된 삶을 살아온 억척 여인 그자체였다.
당연히 우리 형제들은 어머니의 잔정을 받지 못하고 자랐다. 나와 내 가족들은 당시 철저한 흙수저 그자체였다. 아니 잡초같은 인생이었다. 
 
 
  
첫 번째 가출…냉면에 대한 추억 
 
“중 2때 동네친구 이강영, 
아버지 소판돈 훔쳐 도시로 도망가자 제의”
 
1968년…나는 주상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웅양 중학교에 진학했다. 
아버지는 큰 아버지 논에서 머슴살이를 했고 어머니는 성기마을 한 켠에서 산꾼들 상대로 국수, 막걸리를 팔았다. 
 
1968년 우리나라 상황을 살펴보면  1967∼1968년 우리나라 상황을 살펴보면 1967년 제6대 대통령 선거에서 박정희가 대통령으로 다시 당선되었다.
6월 1일 신민당 국회의원 후보 김재화가 반공법 위반 혐의로 구속되었다. 1968년 국내에서는 북한의 대남 도발이 극에 달했던 해이다. 1월에 김신조의 북파 공작원 일당이 박정희 대통령 암살 목적으로 청와대를 습격한 1.21 사태 이틀 뒤 동해에서 미국의 정보함인 푸에블로호를 피랍한 푸에블로호 피랍사건, 그리고 그해 10월에 사흘간 무장공비들이 연달아 침투한 울진-삼척 무장공비 침투사건이 일어났다. 이 사건들이 일어나고 42년 후에도 역사에 기록될 만한 대남 도발이 일어나게 된다.
 
1968년 그해 여름, 여름방학이 왔다. 나는 동네 친구들과 매일 산과 들에서 살다시피했다. 그렇다고 그냥 놀기만 하는 것도 아니었다. 소를 끌고 나가 풀을 뜯기고 꼴을 베는 일은 아이들 차지였다. 아이들은 땡볕이 사그라들기 시작하면 앞서거니 뒤서거니 소를 끌고 나섰다. 
풀이 무성한 개울가나 들판, 야산에 소를 풀어놓으면 알아서 풀을 뜯으며 배를 채웠다. 잠깐 동안의 낫질로 망태 가득 꼴을 채우고 나면 그야말로 자연 시간이다. 
다람쥐를 쫓고 풀섶에 낳아 놓은 새알을 털고 거미줄 매미채로 매미를 잡고, 먹을 것이 지천인 산과 들과 개울을 쏘다니며 하루해를 꼴딱 넘겼다.
도시에서조차 귀했던 과자 사탕 따위는 구경하기도 힘들었지만 심심풀이로 먹을 수 있는 풀과 열매와 생물들은 얼마든지 있었다.
 
여름의 먹거리 중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뽕나무에 열리는 오디와 가시덤불 속에 숨어있는 산딸기다. 그 시절에는 양잠을 하던 집들이 많아 산자락이나 밭 가에는 뽕나무가 늘어서 있었다. 파랗던 오디는 차츰 붉어져 다 익으면 검정색으로 변한다. 뽕나무에 매달려 오디를 따먹고 나면 입술은 온통 잉크색깔이 된다. 손이며 옷에까지 오디물이 든다. 



 
 
친구 이강영이가 말한다. 
 
“아무리 우리가 이 촌구석에 살아봤자, 가난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내가 우리 아버지 몰래 돈을 훔쳐 올테니, 우리, 여기서 도망가자, 도시로 나가자, 죽이 되든지 밥이 되든지, 그곳으로 가자, 너그는 우찌 생각하노?”
“도망갈 돈, 니가 진짜 구해올 수 있나?”
“어제 우리 아부지가 소판돈, 오대다가(어디에 다가) 숨카놓는걸 내가 두 눈 똑똑히 봤다. 오늘밤 내가 무슨 수를 쓰서라도 훔쳐 오쿠마”
친구 강영이의 말을 듣고나니, 불현듯 도시로 도망가 성공하고 싶다는 생각이 일었다. 그래, 내가 살고 있는 벽촌에서 아무리 발버둥 쳐봐야, 아무런 해답이 없다. 우리는 (나, 이강영 류사열) 내일 새벽 강영이가 훔친 돈을 노잣돈 삼아 대처로 나갈 음모를 꾸미고 산에서 내려왔다. 
 
이윽고 다음날 새벽, 나는 고양이처럼 발소리를 죽이며 집을 나섰다. 강영이가 숨을 헐떡대며 뛰어오고 있다. “돈 훔쳐왔나?” “하모(그럼) 사열이 일마는 안 왔나?” 
사열이가 저만치에서 마치 독립군 출정하는 것마냥, 기름때가 묻은, 길고 큰 보따리를 둘러매고 씩씩대며 달려오고 있었다. 
우리는 1초를 다퉈가며 도시로 가는 버스에 올랐다. 버스는 우리가 살고 있는 거창군 주상면 웅양면을 벗어나 마침내 김천에 도착했다. 
태어나 생전, 밟아본 김천이라는 도시! 우리가 살고 있는 벽촌과는 달리 휘황찬란한 불빛과 거리거리마다 수많은 상점들이 있었다. 
  
함양군 수동면에 
냉면 잘하는데 있습니다
 
며칠전(2022년 7월) 채널경남신문 자유기고가 Q로부터 전화가 왔다. “함양군 수동면에 냉면 잘 하는데가 있는데, 오늘 시간 있습니까? 점심 그 곳에서 합시다.”
해서 Q가 지정한 식당으로 갔다. 아직 점심시간이 안 됐는데 만석이다. 
 
“허허 요즘 세상 참 살기 좋습니다, 냉면이 맛 있다고 소문이 쫙 나면 그걸 한 그릇 먹으려고, 물어물어 이곳까지 찾아오니 말입니다. 류영수 회장은 세상에 태어나, 언제, 처음 냉면구경을 했습니까?”
 
“허허 냉면 언제 처음 먹었더라? 우리 어릴 적에 워낙 가난해…그 뭐요, 구황음식 그런 걸 먹고 자랐지요.”
 
구황음식(救荒飮食)이란 흉년 따위로 기근이 심할 때 주식물 대신 먹을 수 있는 농작물이다. 가뭄이나 장마에 영향을 받지 않은 땅에서 자연적으로 자란 작물로 만든 음식이다. 50~60년대 아이들이 가장 즐겨먹던 구황식물은 칡과 쑥이다. 
당시 우리나라 모든 어린이들은 이것을 얼마나 많이 먹었는지 봄만 되면 “엄마 쑥 뜯으러 언제 가?” 할 정도였다. 쑥으로 만든 음식 중 쑥 털털이라고 하는 것이 있는데 쑥이 없을 경우 수루치라는 산나물이 그 대신으로 사용되었다. 이 쑥털털이는 민요 같은데서는 수루치범벅 혹은 쑥 버무리 등으로 소개가 되는 것이 바로 경상도 지방의 대표적인 구황 음식이다. 어머니들이 뜯어온 쑥이나 수루치는 말이 떡이지 그것은 쑥 속에 하얀 밀가루나 쌀가루가 조금 보이는 정도다. 오죽하면 그 이름이 쑥 털털이였을까.
 
칡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다. 나무칡과 가래칡이다. 나무칡은 그야말로 나무뿌리처럼 질긴 칡으로 녹말 성분이 적다. 나무칡이 되는 이유는 땅이 척박한 곳에서 자라면 칡뿌리가 충분한 영양분을 뿌리에 저장하지 못해 녹말분은 적고 섬유소만 많아지기 때문이다. 이런 나무칡을 어릴 때 많이 먹게 되면 광대뼈가 튀어나오고 사각턱이 된다고 했다. 그래서인지 요즘 60~70대 이상의 남자들의 얼굴이 사각턱이 많은 이유라고 하는데 참 웃기고도 슬픈 이야기다.
 
가래칡은 흙이 부드럽고 돌이 적은 양지바른 곳에서 자란 칡이다. 이것은 아주 녹말분이 많아 생칡을 마치 오징어나 쥐포 먹듯이 손에 들고 다니면서 입으로 조금씩 찢어 먹었다. 나무칡은 입안에 녹말이 적어 먹는 시간에 비해 녹말 섭취가 적은데 비해 가래칡은 아주 부드럽고 녹말도 많이 나와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가래칡이 많은 곳으로 칡을 캐러 갔다. 
잠시후 우리 식탁 위에 냉면 두 그릇이 놓여졌다. 
면발이 가느다랗고 육수가 슴슴해 보인다. Q가 그릇째 들고 육수를 마신다.
 
“냉면의 슴슴한 맛은 동치미, 백김치라야 가능하지요. 육수는 배추 백김치 국물이 최고! ”냉면 가락이 가지런하고 배추김치는 푸르다(숭菹碧·숭저벽)”고 했습니다. 이 식당 육수맛이 동치미 맛은 아니지만 심심해 아주 좋군요.“
나무 젓가락으로 면을 집어 한 입 먹고나니, 냉면과 관련된 그옛날 추억들이 주마등(走馬燈)
처럼 내 뇌리 스쳐 지나간다.
  
김천 냉면집과 돼지고기 사건
  
다시 1967년. 우리는 (나, 이강영 류사열) 경북 김천에 도착했다. 
김천(시)은 경상북도 서남부에 있다. 대전광역시와 대구광역시의 중간 지점에 있다.
김천시는 동쪽으로 경상북도 구미시, 칠곡군, 성주군과 접하며 서쪽으로 충청북도 영동군, 전라북도 무주군과 접하며, 남쪽으로 경상남도 거창군과 접하며 북쪽으로 경상북도 상주시와 접한다.
 
시의 이름에는 하늘 천(天)이나 내 천(川)이 아닌 샘 천(泉)을 쓴다. 물이 맛있어서 귀한 물이라는 뜻의 김천이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또한 지명에서 쇠 금(金)자를 쓰면서도 '금'이 아닌 '김'이라고 읽는 예외적인 사례 중 하나다.
 
김천시는 꽤 이른 시기(1949년 8월 14일)에 시로 승격된 도시이다.
같은 도의 포항(인구 51만)은 물론, 전라남도 순천(인구 28만)·여수(인구 28만), 게다가 무려 경기도 수원(인구 120만)과 시 승격 동기이다. 
당시에는 근처 지역(상주, 선산·구미, 영동)의 중심도시 역할을 했던 큰 도시였다. 지금보다 훨씬 전국 인구가 적었던 광복 후 김천시+금릉군의 최대 인구가 20만 명에 이르기도 했다. 
 
김천버스정류장 뒤편에서 강영이가 말했다. “우차면 좋노? 아버지 소판 돈 훔쳐 볼라꼬 밤새도록 찾고 찾고 했는데 소판 돈은 못 찾고 안 있나? 아버지 옷에서 돈을 요거 밖에 못 훔쳐, 너거들 서울 못 데리고 가겠다, 나만 서울 가고 너그는 김천서 알아서 우치 해 봐라.”
 
서울갈 여비가 없다니 어쩔 수 없지. “그래 강영이 니라도 혼자 서울 가서 성공해라, 우리는 김천서 죽이 되든가 밥이 되등가 알아서 하쿠마” 
해서 나와 사열이는 김천에 남게 되었다. 여기서도, 사열이는 사열이대로 나는 나 대로 각자 살길을 찾기 위해 헤어졌다. 
 
수소문 끝에 나는 김천 어느 냉면집에 시다로 들어갔다. 손님들이 먹고 난 그릇을 세척하고 배달부로 일했다.  
하루는 여자손님 몇 분이 식당으로 들어와 냉면을 시켰다. 손님들은 냉면 안에 들어있는 돼지고기(편육)가 질기고 맛이 없었던지 먹지 않고 그대로 뒀다. 
나는 그 것이 너무나 먹고 싶어 주인 모르는 사이 입에 쑥 집어넣었다, 그걸 발견한 주인은 잽싸게 나에게 와 뺨을 세차게 후려쳤다. 너무나 아팠다. 주인은 아직 남아있는 냉면 속 편육을 수거, 물에 씻어 다음 손님에게 줄 요량이었다. 
[관련뉴스]
- 관련뉴스가 없습니다.
트위터로 보내기 미투데이로 보내기 싸이월드 공감
기사글확대 기사글축소 기사스크랩 이메일문의 프린트하기
군민 혈세 함부로 쓰는 공무원
조회수 : 1453회ㆍ2018-09-15
현재접속자
(주)채널경남의 모든 컨텐츠는 저작권법 보호를 받으며, 무단복제 및 복사 배포를 금합니다
상호명:(주)채널경남 | 사업자번호:611-81-24117 | 사업장 : 경남 거창군 주상면 웅양로 1124
발행인 : (주)채널경남 류지엽 | 편집인 : 류지엽 | 청소년보호책임자 : 류지엽 | 등록번호 : 경남, 아00233 | 등록일 : 2013년 7월 8일 | 발행일 : 2013년 7월 8일
TEL.010-2439-3876 | FAX.070-4078-7499 | E-mail : chgn486@naver.com

Copyright(c) 2022 채널경남 All rights reserved.